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 정말… 끝난 건가. 길고 긴 악몽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더이상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의 환영도, 조커의 달콤한 속삭임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숨을 내쉬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작은 진동음이 바닥을 타고, 침대 다리를 기어올라와 제이슨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10초. 어쩌면 그보다 더 짧게 걸릴 수도 있고. 딕은 생각보다 발이 빠른 놈이니까.
도망 가야 할까?
제이슨은 눈을 감은 채로 짧은 사색에 잠기다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아니, 이미 늦었을 게 뻔했다.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저 눈만 떴을 뿐인데도 자신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달려오는 걸 보면, 분명 어딘가 제 생체 반응과 연결한 시스템을 작동시켰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얘기는 결국, 제이슨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저택의 보안도 한층 더 강화해놨다는 얘기의 방증이기도 했다.
어설프게 몸을 움직이다 들켜서 애매한 시선을 나누느니 차라리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게 훨 나은 처사였다. 제이슨은 몸에서 힘을 뺐다. 딕과 다시 한 번 마주하면, 과연 무슨 말을 나눠야할지. ……아니지. 그 놈이 나와 나눌 말이 뭐가 있겠다고. 제이슨은 괜한 걸 걱정 하고 있었던 스스로가 우스워져 혀를 내둘렀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냥 늘 그랬듯이, 자신을 붙잡는 그를 무시로 일관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어차피 그럴 거면서 지금 도망을 치지 않는 건, 그래 어쩌면. 그렇게 잠시나마 그의 얼굴이 보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을 거라고, 제이슨은 그런 역겨운 가정을 덧붙였다.
하나, 둘.. 셋.
"제이슨!"
큰소리를 내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 *
"괜찮은 거야? 그러게. 가만히 있지, 대체 왜 혼자 빠져나가서는-"
"너 그렇게 사라지고나서 팀이랑 브루스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알프레드는 또 어떻고.
"아직 그때 네가 맞은 빌런빔의 증상이 뭔지도 모르는데…."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증상? 증상이라면 이미 지겹도록 겪어봤는데.
제이슨은 속으로 자조적인 말을 내뱉으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 앞에는 빌어먹게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청색의 눈이 자리하고 있었다. 흔들림 하나 없이 곧게 뻗어오는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짧게 혀를 차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딕은 여전히 걱정 어린 시선으로 제이슨을 내려다보면서도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비켜."
"..가려고?"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 발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딕은 만약 귀와 꼬리가 달려있었다면 아래로 축 쳐져 있는 게 눈에 보였을 정도로 풀이 잔뜩 죽은 강아지처럼 굴며 제이슨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너 아직 검사도 다 못했고.."
"비키라고 ㅎ…, 윽."
"이것 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면서 어딜 가려고?"
균형조차 제대로 잡지 못해 비틀거리는 몸으로도 잔뜩 날을 세우는 꼴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제이슨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탄식같기도 한, 그런 한숨. 딕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저를 향한 명백한 증오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제이슨이 살아났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산산조각이 난 헬멧 사이로 언뜻 보이는 청색의 눈을 마주했던 그 날. 딕은 순간 오늘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며 코스튬을 입은 채로 환하게 웃던 어린아이의 맑고도 또렷한 눈이 겹쳐보여, 날아오는 단도를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어깨를 내주어야만 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살을 찢고 그 안을 파고드는 생경한 감각을 곧이 곧대로 느끼면서도, 딕이 피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는지 약간의 놀라움이 깃드는 시선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제이슨이 살아나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며칠간의 조사 끝에 그게 사실이라는 걸 밝혀내고는 웨인 저택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가진 외계인이 하늘을 떠다니고 아마존에서 온 전사가 인류의 전쟁을 막는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도, 부활이라니. 죽은 사람이 되돌아왔다니.
대체 어떻게? 왜? 누가?
질문은 수도 없이 생겨났지만 그에 답을 해줄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딕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제이슨 앞에서 떳떳치 못한 입장이었다는 것쯤은 딕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딕은 제이슨이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중에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마지막에 알게 된 사람이었다. 어린 아이의 작고도 연약한 몸이 뒤틀리고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생명의 끈이 끊어지려 하고 있을 때, 본의 아니게 다른 행성에 발을 딛고 있었던 탓아었다.
하지만, 설령 그 당시 내가 지구에 있었더라도 제이슨을 구할 수 있었을까?
어느 누구도 딕에게 제이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가 책임 질 일도 아니었거니와 그런다고 해서 죽은 제이슨이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딕은 이미 흙으로 덮여 제이슨의 몸집만큼이나 작은 비석만이 우뚝 솟아있는 그의 무덤 앞에서 끝내 무너져내리며 하염없이 생각했었다.
나는 앞으로 평생, 이 아이에 대한 죄악감을 품에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홀로 죽어갔을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그를 죽인 자에 대한 분노, 미처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향한 혐오감, 경멸, 증오. 이 모든 감정들은 순식간에 하나로 합쳐져 크나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이는 딕의 마음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과거를 딛고 오직 정면만을 내다보며 꿋꿋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딕을 이따금씩 안에서부터 천천히, 망가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서우면서도 거센, 바람이 되곤 했다.
제이슨은 딕에게 있어 유리 조각과도 같았다. 한없이 날카로워, 손에 쥐고 있으면 붉은색 물감보다도 더 짙은 선혈을 흘리게 만들기에 그만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고있으면서도. 환하게 내리앉는 햇빛을 향해 들어올리면 그를 통해 들어오는 어여쁜 무지개빛을 도저히 잃을 수가 없어서 가만히 손 안에 간직하게 만드는 그런 유리 조각. 제이슨은, 딕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허나 그동안 딕이 제이슨을 그리워하며 그를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해도, 모든 일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애석하게도 둘의 기적과도 같은, 나이트윙과 레드후드가 아닌 딕 그레이슨과 제이슨 토드와의 재회는 썩 좋지만은 않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고담에 난데없이 나타난 '레드후드'의 존재가 남긴 여파는 생각 이상으로 막강했으며, 그에 몸도 마음도 잔뜩 지친 상태였다. 자신의 자리를 대체한 새로운 로빈의 존재를 알게 된 제이슨은 브루스를 비롯한 딕에게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으며, 이는 곧 제이슨의 마음을 서서히 비참함으로 물들여갔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다. 제이슨의, 방향이 불분명한 증오심이 한순간에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건.
어째서 그리 쉽게 자신을 대체할 놈을 데리고 온 건지. 어째서 자신을 죽인 자가 여전히 사지 멀쩡한 채로 고담을 쏘다니고 있는지. 어째서, 어째서……. 당신들은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는지.
아마 제이슨이 하던 생각들은 이런 것이었을 게 분명하다고 홀로 짐작했던 딕이었다. 실은, 새로운 로빈을 들이기 이전에 수도 없는 거절을 고했고, 한평생 짊어지고 살아가기로 다짐한 '신념'을 그만 내던지기 직전까지 내몰린 적도 수도 없이 많았으며, 약에 취해 겨우 잠이 들었다가도 꿈 속에서의 너를 마주하고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오열하는 날 또한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 모든 걸 전해주기엔 우린 이미 너무 먼 길을 돌아온 상태였다.
…마치 끊어지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제 발로 걸어다니는 듯 했다. 잡으려 했으나, 잡히지 않았고. 잡고 싶었으나, 잡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 제이슨은 우릴 도발했고, 평생의 약속을 다짐한 신념까지 저버리는 그의 행동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 도발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감정이라는 건, 파도와 비슷해서 처음엔 한없이, 힘차게 휘몰아쳐 근처에 나있는 단단한 바위에게조차 영향을 주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힘은 약해지고 이내 바위에게 닿지도 못한채로 홀로 잔잔하게나마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파도의 물결이 지닌 감정을, 딕은 '후회'라는 단어로 일컬었다.
딕은 파도였고, 제이슨은 바위였다.
바람과 같은 갖은 원인으로 인해 딕은 제이슨에게 닿을 수 있었지만, 그건 결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딕은 제이슨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제이슨은 그로 인해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조금씩 상처가 났다. 시간이 흐르면 딕은 천천히 후회라는 이름을 한 잔류를 남겼지만 이는 끝내 제이슨에게 닿지 못하는, 그러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애틋함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어진 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하고, 미워하고. 그러면서도 그를 그리워하는 이상한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지겹도록 이어지는 무한의 끈을 끊어낸 건 다름 아닌 무의식이 내비친 제이슨의 진심이었다.
그 날의 제이슨은, 평소와는 달리 미간을 찌푸리지 않은 상태의, 말 그대로 딕이 오래 전부터 봐왔던 로빈인 '제이슨 토드'의 얼굴을 한 채로 깊은 수마에 빠져있었다. 한 번 흥분하면 정도를 모르고 나서는 제이슨을 대비한 팀의 진정제 덕분이었다. 진정제를 놓기 무섭게 맥없이 스르르 아래로 쓰러지는 제이슨을 보며 너무 심한 처사였나, 와 같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도 하였으나 요며칠 밤낮 가리지 않고 고담 이곳저곳을 쏘다니던 제이슨, 아니 레드후드의 모습이 떠올라 딕은 그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다부진 몸을 두 손으로 안아올려 침대에 조심히 뉘였다. 살짝 삐져나온 베개까지 정리해주고 그 옆에 살포시 몸을 내려 앉았다. 허공에 손을 띄운 채 잠시 머뭇거리던 딕은 곧 용기를 내듯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밑으로 흘러내려 얼굴을 가리는 앞머리를 살짝 쓸어넘겨주자, 그림자가 질 정도로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제이슨은 이게 참 예뻤지.
새삼 어릴 적에, 남들보다 유난히 긴 제이슨의 속눈썹을 보며 '예쁘다'고 한마디 했다가 된통 얻어맞았던 시답잖은 기억에 딕은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진정재의 효력이 좋아 다행이라며, 오늘 밤은 조용히 지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한참동안 제이슨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딕은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움직였고, 그 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딕."
..어?
딕은 놀란 눈으로 뒤를 바라봤다. 다행히도, 진정제의 효력이 다 한 건 아니었는지 제이슨은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하나 다른 점은, 그의 눈가 사이로 투명하면서도 반짝이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거. 순간 몸이 얼어붙은 딕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곧바로 무릎을 구부리고는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흐윽.. 하아, 흐…. 딕.. 디키,"
"왜, 왜. 제이슨. 나 여기 있어. 괜찮아……."
"…가지마. 가지.. 흐윽, 가지마.. 제발."
잠결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떨리는 손으로 딕의 체온을 찾아, 시트 위를 더듬거리는 제이슨의 행동에 딕은 저도 모르게 탄식 어린 실소를 내뱉었다. 마음에 구멍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담고, 또 담아 뚜껑조차 제대로 닫히지 못할 정도로 꾹꾹 눌러담았던 감정들이 모조리 빠져나갔는데, 그걸. 구멍이 났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 마음이 이리도 쉬운 거구나. 딕운 마치 더운 여름 날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그동안 제이슨을 향해 담고있었던, 차마 말 못할 이기적인 감정들이 전부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며 실소를 내뱉었다. 그렇게 그는 제이슨과 마찬가지로 떨려오는 손으로 천천히 그의 손을 마주잡아주고는 그대로 시트에 얼굴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자신은 결코, 이 아이를 그저 제 유산을 물려준 동생으로만 여기지 않았다고.
* * *
팔을 부여잡는 딕의 손길을 뿌리친 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앞에 다가섰다. 딕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정말이지.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아주 잠깐은.. 얘기라도 나눌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후, 알았어. 안 그래도 로이 불렀으니까-"
"뭐?"
"로이.. 불렀다고."
"나랑 걔랑 무슨……. 하, 됐다."
답지 않게 로이의 일임에도 까칠하게 나오는 제이슨을 보며 딕은 의아한듯 고개를 기웃거렸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제이슨은 문이 열리기 무섭게 걸음을 옮겼다. 길게 이어진 복도에는 걸음을 딛는 구두굽 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계단에 다다르기 직전, 한참을 고민하던 딕이 먼저 말을 건네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듯한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제이버드-!"
로이였다. 제이슨은 자신을 향해 크게 팔을 흔드는 로이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딕은 그런 제이슨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로이는 이제 막 집에서 나온 건지 평범한 일상복 차림이었다. 그는 제이슨의 바로 뒤에 있는 딕에게는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한때는 오랜 친구였고 서로의 등을 믿고 맡겼던 동료의 싸늘한 대우는, 이제는 좀 익숙해져야 할 정도로 오래 된 것임에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싸해지는 기분을 남기곤 했다.
늘 그랬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제이슨의 어깨를 끌어안는 로이를 바라보며 딕은 입을 열었다.
"제이슨."
"……다시는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마."
네가 날 구하려 들지만 않았어도. 네가 날 감싸지만 않았어도. 네가…내 안위보다 널 더 신경썼다면 그렇게 네가 고통 받을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 제이.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구한 거야?
끝없이 이어지는 뒷말을 겨우 삼켜냈다. 제이슨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로이는 잠시 딕을 향해 뒤를 돌아봤다가 그대로 제이슨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단란하게 어깨를 끌어안고는 계단을 내려가는 둘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딕은 그제야 막힌 숨을 뱉어낼 수 있었다.
사랑한다고 했어야 했을까.
내가 내 마음을 자각하고서, 곧바로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야 했을까. 응? 그랬어야 했을까, 제이슨. 그래야, 그래야…….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딕은 그동안 제이슨 덕분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잔뜩 까칠해진 얼굴을 투박한 손길로 쓸어내렸다. 손에 쥔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살갗을 찢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 끝이 아려왔다.
* * *
"그래서, 뭐였는데?"
"뭐가"
"빌런빔 맞았다며. 증상이 뭐였냐고"
"..너한테 그런 거까지 얘기했어?"
뭐…. 그래야 내가 올 테니까? 반문하는 로이의 태도에 제이슨은 실소를 내뱉었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뭐 그거 하나 알려주는 것도 어렵냐"
툴툴거리며 대답하자 제이슨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순간 시선이 멈춘 로이는, 빤히 쳐다보는 제 시선에 의아함을 느낀 제이슨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제야 언제 그랬냐는듯 황급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악몽."
"스케어크로우가 뿌리고 다니는 거랑 바슷한 건가?"
"음, 뭐…. 그럴지도 모르지."
"무슨 악몽이었는데? 아, 막 나 없어져서 울고불고 난리났었구나. 그렇지?"
"지랄도 그 정도면 병이다."
저택을 빠져나가는 길은 둘의 큭큭대며 웃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대화의 맥이 끊기자 제이슨은 곧바로 입을 닫고는 묵묵히 제 갈 길만을 가고 있었다. 로이는 그 뒤를 착실히 따르면서도 멍하니 방금 전 딕과 제이슨이 함께 있던 장면을 떠올리며 짧은 사색에 잠겼다.
딕 그레이슨은 제이슨 토드를 좋아한다. 제이슨 토드도 딕 그레이슨을 좋아하고. 그리고, 로이 하퍼도 제이슨 토드를 좋아한다.
와우! 이 얼마나 나만 멍청해지기 좋은 삼류 시나리오인지.
로이는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이 시나리오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들이 전부 멍청하고도, 또 멍청하기에. 아직 자신에게 미세한 기회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치, 헛된 희망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러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야, 안 오고 뭐해."
머릿속이 바빠, 걷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자 제이슨이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봤다. 로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단걸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또 무슨 생각 했냐, 너."
"음……."
"뭐."
"그냥…. 제이버드. 너는 좀, 사랑 받는 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뭐라는 거야, 등신이.
원색적인 비난에 로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네가 그렇게 나올만한 말만 하잖아! 둘은 티격태격,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위를 향한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진 않았다.
대문을 완전히 나서기 전, 로이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 척 보기만해도 드센 기운이 느껴지는 저택을 바라봤다. 거리가 멀어 실질적으로 누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째선지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창문쪽에 눈길을 두며 생각했다.
결국 나도 제이슨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기에. 아주 어쩔때는 조용히 내가 빠져주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결국 나도, 제이슨이 행복해지는 걸 바라는 사람이기에 정말 어쩔때는 그저 나 혼자만 아프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그런데, 그러면서도. 이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그렇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서. 그러니, 조금만. 부디 조금만, 너도 나와 같이. 좀 더 고통스러워 해달라고. 친구니까, 동료였으니까. 그 정도는 좀 해달라고.
..어차피 너는 제이슨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아주 잠깐만이라도. 나한테 양보 좀 해줘라.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리도, 이기적이면서 치졸한 사람이었는지. 로이는 새삼 사랑이라는 게, 사람 한 번 참 이상하게 만들기 좋은 거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