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드?"
주인도 없는 안전가옥에 홀로 앉아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슬레이드 윌슨, 세간에서는 데스스트로크라고 불리는 자였다. 제이슨은 살짝 피곤하단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몇 번 대준 게 이렇게 네 멋대로 찾아와도 된다는 허락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
상대가 뭐라고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얼굴로 제 할 말만 하는 모양새가 그 누가 봐도 슬레이드였다. 적어도, 환각은 아니란 소리였다. 제이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쓰고 있던 헬멧을 벗었다.
"그래서, 왜 온 건데"
"..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걸 보니, 또 그놈과 만났나 보지?"
"알면 알아서 좀 꺼지든가"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제이슨의 까칠한 태도에 진작 나가떨어졌겠지만, 상대는 슬레이드였다. 슬레이드는 아주 잠깐의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보여주더니,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제이슨의 몸을 들어 안았다. 당황한 제이슨이 그의 두터운 팔을 있는 힘껏 때리며 버둥거렸지만 평범한 인간과 유전자 자체가 다른 그의 힘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체, 무슨- 읏, "
슬레이드는 제이슨을 들어다가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제이슨이 발버둥을 치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기 무섭게 다시 그의 어깨를 잡아 누르고는 그대로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주는 슬레이드였다.
졸지에 꼼짝없이 이불에 온 몸이 감긴 제이슨은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는 듯한 얼굴로 슬레이드를 노려봤다. 하지만 슬레이드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자지 그래"
"너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오겠냐?"
"나는.."
"아, 됐어. 말하지 마"
제이슨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을 끊었다.
슬레이드와 이런 사이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충동적인 선택에 불과했었다. 그 날따라 신경을 거스르는 빌런들이 너무 많았으며, 그 날따라 부품이 망가지기라도 했는지 총알이 제대로 발사되지 않았고, 그 날따라… 딕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떠나가질 않았었다.
한 마디로 스트레스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상태였다는 얘기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찮게도 적을 무참히 썰어내고 있던 슬레이드와 마주쳤고, 그가 평소 딕과 깊은 사이이지만 그게 결코 좋은 쪽은 아니었다는 걸 상기해낸 나는, 단걸음에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을 건넸었다.
'나랑 잘래?'
그러니까, 그 얘기를 들은 슬레이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나와 똑같이 얼굴을 가리는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저로 밥을 떠서 먹는 것보다 총알을 장전하는 게 더 익숙할 놈이 그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탄창에서 계속 손을 미끄러뜨리고 있었으니, 굳이 '놀랐냐?'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당황해하고 있었는지는 대강 예상이 갔다.
자기 파괴적인 면을 섹스로 해소하는 게 좋지 않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젠 그게 버릇이 되어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였었다. 아무리 충동적이었다지만, 슬레이드에게 그런 말을 건넨 것도 결국 그런 일의 연장선이었을 게 분명했다.
슬레이드와의 섹스는, '자기 파괴적인 면을 해소'한다는 말에 걸맞게 상당히 고통스러웠었다. 배려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짐승과도 같은 움직임이 썩 마음에 들었다. 비록, 자신이 슬레이드와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 딕이 꽤나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상을 하며 미약하게나마 만족감을 느낀 스스로가, 미치도록 역겨웠지만 말이다.
예상과 다르게 그와의 관계는 그 뒤로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묘하게 다정해지는 손길이 신경 쓰여 그만 끊어내려고도 했지만, 이 빌어먹을 놈은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찾아와 이렇게 답지 않은 행동을 하며 제이슨을 심히 골치 아프게 만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더이상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걸 몸소 보여주며 그를 등진 상태였지만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 오늘은 안 해."
결국 제 발 저린 제이슨이 먼저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슬레이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슨은 괜히 귓가가 달아올랐다.
"난 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아니, 시발… 네가 와서 하는 게 그런 짓밖에 없으니까-"
"그래, 그래. 알겠어. 안 건들 테니까 좀 자두지 그래"
슬레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슨을 껴안은 팔에 힘을 줘 자신에게로 더 끌어당겼다. 그에 제이슨의 신경이 어쩔 수 없이, 아래로 향했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건들지 않는다 했으니, 진짜 안 건들겠지.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받아주지도 못할 것이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자고 있는 사람을 건드는 취향 같은 건… 없겠지. 아니, 없어야만 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걱정부터 앞서긴 했지만 근 이틀 동안 겪었던 일 덕분에 몸은 너무도 피로한 상태였고, 그 피로를 해소하는 게 더 우선이었다. 그렇게 제이슨은 등 뒤에서 들리는 일정한 숨소리에 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흐, 하아.. 제발, 제발… 브루스… 아니야, 난 아직..'
'쉬이- 괜찮아, 제이슨…'
괜찮아, 괜찮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빛이 서서히 드는 새벽, 제이슨은 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환각에 시달리는 자신을 누군가가 밤새 끌어안고 달래준 것만 같은…
"..슬레이드"
불현듯 자신이 밤새 누구와 함께했는지를 떠올린 제이슨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침대 옆 협탁에 꽂힌 작은 칼 한 자루를 보며, '꿈'이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띠링'
적막만이 감도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알람이 짧게 울렸다.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알리는 울림이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탁자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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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예상을 깨고 로이가 아닌 다른 캐를 집어넣어봤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스토리에 중요하게 작용될 거 같진 않지만 ㅎㅅ
다음 타자는 다시 한 바퀴 돌아서 페이드님!!!
잘 부탁드려용